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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

변화의 방향이 우상향이 아닌 좌하향 혹은 수직하락과 직면할 때

나의 총기는 분노를 넘어 무기력으로 급선회 한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공든 탑이 흔들릴 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트레스 홀몬으로 분기탱천 하지만

공든 탑이 무너진 이후 부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하리'의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어깻죽지가 축 쳐지니 말이다.


일종의 현타행 완행열차에 탑승하면

썩어가는 나의 몸뚱아리를 보면서도 웃을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

이것을 자조라 해야 하나. 실소라 해야 하나.  



ㅡㅡㅡㅡㅡㅡ




1.

"아이고~ 미안해서 어쩌까잉.

아침 일찍 왔는디 문이 안열려 있어 또 왔네잉.."


오픈하자마자 동네할머니가 안경을 들고 왔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평할 수는 없으나

흔히 듣는 저 멘트 속에는 행간의 의미가 섞여있음을

안경밥 먹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아이고'

=>

노인을 왜 두 번이나 걷게 만들었냐는 야속함의 감탄사

몸이 힘드니 잘해달라는 뜻


'미안해서'

=>

본인이 잘못한게 없음에도 상대를 미안하게 만들 때 습관적으로 선수치는 형용사

한마디로 잘해달라는 뜻


'문이 안열려 있어 또 왔네'

=>

당신은 새벽잠이 없으니 문을 빨리 열어달라는 무언의 시위이자

다른 곳을 안갔다는 변함없는 지조

더불어 젊을 때 부지런을 떨라는 윗세대의 가르침

마음도 힘드니 잘해달라는 뜻


  

"가만히 앉아있는데 저절로 알이 툭 빠져버리네.

알 좀 끼우러 와써이~"


'가만히,저절로'

=>

당신이 초능력자 유리겔라가 아니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 잘못이 없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상투적 부사

한마디로 만든 니가 잘못했다는 뜻



손님 얼굴이 낯익은데 내방고객인지 아닌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면 이것은 두가지다.

매장을 자주오는 단골은 아니지만 임택트가 있었던 뷔아이피 혹은 진상..

비로소 안경을 확인 하는 순간 기억의 타임머신은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순차별로

서사하며 신분을 조회한다. 


동네할머니가 가져온 안경케이스를 살며시 열어보았다.

아니었다. 둘 다 아니었다.

케이스를 열자마자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두 글자가 시신경을 타고 들어왔다.


잉크를 많이 빨아먹은 듯한 두껍고 진한 고딕체의  '으떵'이라는 두 글자는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물건의 정체를 심도있게 관찰하라는 강려크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순간 나는 TV쇼 진품명품에 나오는 골동품 감정위원처럼

할머니의 안경을 상하좌우 돌려가며 유심히 관찰했다.


프레임은 브랜드금장 디자인을 본딴 알파벳 'C'자로 시작하는 듣보르 메탈이었다.
오른쪽 다리는 거수경례를 하듯 하늘을 향해 45도 각도로 꺾여있었고
왼쪽 다리는 부처님의 가부좌처럼 전면부 앞쪽 비무장지대까지 접혀있었다.


도금은 여기저기 벗겨져있었다.
벗겨진 도금의 상태를 보니 안경을 착용한 기간과 비례하지 않아 보였다.

세월의 탈색이나 생활스크래치가 아닌 손톱으로 긁으면 쉬이 벗겨지는 얇은 도금.

오렌지색인지 갈색인지 구분이 안되는 오묘한 칼라의 무광.


15% 착색된 렌즈의 코팅빛깔은 여름의 짙은 녹색이 아닌

가을볕에 건조된 시래기빛 연두색. 


렌즈 빠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대규모의 피팅이 요구되는 중환자의 상태였다.

안경을 후다닥 스캔한 다음 빠진 렌즈를 프레임에 살짝 갖다대보았다..


호곡~

세상에 이런 일이..

렌즈를 가볍게 앞쪽에서 쑥 밀어넣으니 뒷면으로 피융~ 하고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나사가 심하게 풀려있나 싶었다.

아니었다.

나사는 근엄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프레임 안으로 빨려들어간 렌즈는 장착되었다기 보다

걸려있었노라고 말하는게 적절해보였다.

빠킹을 넣어도 공간이 너무 커서 빠킹이 빠큐~메롱 하면서

꾸역꾸역 토해낼 각이었다.


프레임 안에 걸려있는 위태로운 렌즈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프레임 안의 렌즈가 자동차의 와이퍼처럼 갸우뚱거리며

나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할머니.. 안경 상태가 썩 좋지 않네요.

렌즈만 끼워서 될게 아니라 맞추신 곳에서 수리를 받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연세가 있는 어르신이라 우리집에서 맞춘 안경이 아니니

대놓고 맞춘데로 가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들이 맞춘 집으로 가자고 했는디

알이 빠져서 급하게 가까운데로 왔슈.. 얼마요?"


'급하게 가까운 곳이라...

대부분 그래서 자기 집 가까운 곳에서 맞추는 건데..

하긴 요즘 전부 차 있고 네비 있고 핸드폰 있는데  그 어딘들 못가리..

내 지인들도 산넘고 바다 건너서 오는데..'


"제가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으니 이건 돈 안주셔도 돼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안경'이란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었을까.

안경을 저 따위로 만드는 이들이 있으니 내가 밥먹고 살 수 있다는 일말의 안도감이었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라 모든 안경이 100% 완전무결한 상태로 나오기는 힘들고

표본이 적으니 이 하나만을 꼬집어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에게 불어닥친 전반적인 현실이 그렇지 않던가.


'업계 꼬라지 참 자알 돌아간다..'




2. 

식은 커피를 버리고 나니 낯선 여자 손님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다이렉트로 말을 던졌다.


"여기는 혹시 아뀹으 몇프로 할인해줘요?"


'세상이 변하니 멘트도 바뀌는구나..'

보통 아뀹으를 찾는 사람들은 판매유무나 제품종류,

여타의 제품정보를 묻는 게 일반적인데

다짜고짜 몇% 디씨를 해주냐고 묻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손님 말씀대로 몇%를 디씨해드려야 할지 몰라 판매를 하지 않습니다.

일부 체인점이나 대형매장처럼 동일한 가격으로 사입되지도 않고 

유통기한이 있는 제품의 수요를 맞출 수도 없어 부득이 팔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정가에 팔았는데 다른 곳보다 비싸면 손님이 두번 다시 오시겠습니까.

제가 마진없이 제품을 드려도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비쌀 수 있으니

팔지 못하는 거죠.

이것이 우리나라 안경업계의 현실입니다.

아주 공정한 세상이죠?"


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손님 눈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손님이 무개념스러워서 입바른 소리 한번 했는데

손님이 우리 업계의 고충을 공감한다는 듯 너무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여기 있는 다른 제품을 달라하니...


허허..

대체 이 여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거야 선녀님인거야.


하지만 말 몇마디로 돌려팔기 신공이 성공했다는 기쁨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자괴감이 먼저 앞섰다.

'아뀹으 아니라도 다른 놈들도 모조리 다 똑같은 도독놈 새끼들인데..

진정 격렬하게 안팔고 싶다..'


"아니에요. 일부러 안써본 제품 써보실 필요는 없어요.

괜히 다른 거 썼다가 눈에 안맞을 수도 있거든요"


그냥 하나라도 팔 걸 괜한 짓을 하나 싶었지만,

바르고 올곧은 태도로 일관하던 내 표정을 

샤랄랄라 화색으로 급변시키기엔

내 낯짝이 그리 두껍지는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사가겠다는데 억지로 안팔 수는 없어서

감사한 마음에 습윤액을 써비스로 하나 넣어 드렸다.


아이옵트의 전래동화처럼..

'친절하게 습윤액 하나 드렸더니 다음에 크롬하츠 하나 맞추고 가더라'는

설화가 탄생하길 은근 기대했다 .


하늘도 감복했는지 오랜만에 만노도 하나 팔았다.

만노와 수경을 지키자며 목청 높여 업권을 수호하신 그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하루종일 연말정산 영수증 끊어주느라 뭔가 바쁘고

부가세 신고하느라 뭔가 정신 사납고

설연휴가 다가오니 뭔가 썰렁하고

통장잔고도 올인나니 마음이 허하긴 마찬가진데

오늘따라 기분이 욜라 쐐하다.


그럼 그렇지.

자동차세 고지서가 또 날아왔다..;;

시련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가온다.


현재시간 저녁 여덟시 정각.

오늘 매출은 이게 전부다.


어느 분 말씀대로 드디어 우리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이 생겼다.

아니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 된 것 같다.


씹우랄~

퇴근이나 하자.


?
  • ㅋㅋㅋ 2020.01.21 21:27 (*.118.49.29)
    추천버튼이 있다면 누르고싶네요 재밌어요 ㅋㅋ
  • 추천둘 2020.01.21 21:49 (*.111.13.116)
    글이 엄청 재밌으면서도 무지무지 날카롭네요ㄷㄷ
    뉘신지 모르지만 완전 내스타일임ㅋㅋ
    아 잼따~ 담에 또 써주세용~
  • 하루키꺼져 2020.01.21 22:09 (*.111.13.16)
    아이옵트에 이런 명문이 있다니요
    딴거 하지 모하러 이거해서는 ㅜㅜ
    필력 오집니다 !!!
  • 나홀로 2020.01.22 10:23 (*.194.43.130)
    안경하지말고 글쓰세요...겁나 재밌어요 팬될듯......ㅎㅎㅎ
  • 추천 2020.01.22 10:41 (*.151.93.235)
    글 진짜 잘쓰심^^ 재밌어요ㅋㅋ
    오늘은 대박나세요
  • 란돌트 2020.01.22 11:16 (*.190.27.66)
    지저분한 담벼락에 필력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엄지척 2020.01.22 13:21 (*.7.51.36)
    와 대단하신 글솜씨.
    안봐도 어떤 내공의 분인지 감이옵니다.
    뭘해도 성공하실분입니다
  • 졸라즐라탄 2020.01.22 13:39 (*.182.98.17)
    재미있네여 . 스스로 개혁하지않으면 결코 개인이든 단체든 생존하기힘들고 발전은 더더욱 기대하기 힘듭니다
  • 옵트 2020.01.22 13:54 (*.245.173.133)
    직업 바꾸세요
    그좋은 능력을 가지고 왜 하필 거지같은 안경업계에 계신지 능력이 너무 아깝네요
  • 꿀잼이었음 2020.01.22 13:56 (*.111.12.140)
    안경사 하기엔 아까운 필력입니다 지금이라도 다른걸 알아보시는게 좋을듯요
  • 대다나다 2020.01.22 19:16 (*.104.127.38)
    이야 아이옵트에 이런분이 계시다니요??? 제 뇌가 호강했습니다. 솜씨 좋은글 정말 잘읽었습니다!!!!
  • 웃픈현실ㅋㅋ 2020.01.22 20:00 (*.151.36.15)

    (추천)(좋아요)(구독)(알림설정) 모두 누르고 싶네여 ㅎㅎㅜㅜ

  • 황금안경상 2020.01.23 10:21 (*.111.14.253)
    안경신문 신춘문예 단편부분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봉준호의 황금종려상에 필적할 만한 작품입니다.
    요즘 사회분위기와 업계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아주 재밌게 담아내셨네요.
    어제 읽고 오늘 또 읽었습니다.
  • 2020.01.23 12:07 (*.213.9.239)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를 한편 읽은 듯한 느낌이다.
  • ㅋㅋ 2020.01.23 16:34 (*.222.20.145)
    글이 많아서 안읽고 내림 ㅋㅋ수고하소
  • 응답하라 2020.01.24 00:18 (*.165.55.99)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공감되고 배잡고 웃었다 ㅋㅋㅋㅋㅋ
    또 올려주샘 ㅋㅋㅋㅋ
  • ilililil 2020.01.24 10:53 (*.229.203.226)
    진짜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글을 정말 잘쓰시는데 능력이 아깝네요 이런글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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