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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울하다.

나도 우울하고 길 건너 점포도 우울하고,

길가를 나뒹굴다 옆구리가 찢긴 낙엽들도, 

배가 터질 듯 가로수에 몸을 기댄 쓰레기봉투마저 우울이 창궐한다.


수요일은 일반쓰레기를 수거해가지 않음에도

개념 무탑재한 어떤 인간이 대형 쓰레기 봉투를 매장 근처에 내놓아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쓰레기 봉투 안에는 인간의 서식이 담겨있다.

무엇을 먹고 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쓰레기를 배출한 구성원의 나이까지 가늠할 수 있다.


심지어 똥 닦은 휴지가 변기에 처리되지 않고 봉투로 이관된 경우에는

변기의 성능, 즉 건물 수도관의 수압을 유추할 수 있고, 

휴지에 켜켜이 묻은 똥의 면적에 따라 배설자의 똥 닦는 습관과 

괄약근의 조임 상태까지 알아낼 수 있다.


그렇듯 인간이 쓰다 버린 최종 산물들은 쓰임새의 높낮이를 불문하고 

봉투 속으로 한데 집결하여 서로 엉키며 조우한다.




2.

유유상종.

쓰레기는 쓰레기끼리 만난다는 말처럼

쓰레기도 쓰레기 나름대로의 권위가 있다.


본래의 쓰임을 다 하고도 폐기의 기한이 남아있다면

운 좋게 다른 이에게 무상입양되거나

당근당근 거리며 저가에 팔려갈 기회를 얻기도 한다.


저가?

갑자기 괜스레 기분이 나빠지지만

하여간 최소 재활 가능한 쓰레기들은 뜨거운 화로에서 성형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반면 봉투 안으로 들어가는 쓰레기들은 다수가 재활 불가의 것들이다.

인간 군상에도 소위 잡범 내지는 개전의 정이 없는 범죄자들이 쓰레기에 비유되고

그들은 인간쓰레기라는 별칭을 부여받는다.


'쉬바... 내 주변엔 왤케 (인간)쓰레기가 많은거야

하여간 애새끼들이 끼리끼리 놀아요'


나는 생각한다.

물론, 부정적인 생각이다.


내 주변에 쓰레기들이 많은 이유가

내가 쓰레기들의 영혼과 코드가 맞거나

내가 파리처럼 쓰레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었거나


반대로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쓰레기들이 나를 우습게 알거나

쓰레기들이 나를 쓰레기 봉투인냥 자신들의 안식처로 생각하거나 

그들의 욕구를 충족해줄 무언가가 내게 있다는 뜻일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나의 모든 추측이 틀렸다면 정답은 하나.

내가 자리 잡고 숨 쉬는 이곳이 바로 

커다란 쓰레기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기,횡령,절도,협박,장물 등의 형법상의 찌꺼기와

노동착취 등의 고용노동법에 관한 찌꺼기

그리고 돈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인간들의 정서적 배신까지..

 

내가 이 바닥에서 밥을 먹은지 꽤나 됐지만

내 정신에 남아 있는 찌꺼기들을 계량해보니

모든 오염의 발원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오롯이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내 자신에 있었음을 알게 됐다. 

  

오늘 부로 다

버리기로 했다. 

   



3.

압축 세번, 압축 네번.

쓰레기더미를 돼지대가리 누르듯 프레스로 꽉꽉 누른 것도 아닐진데

압축을 여러번 할 수록 어떤 고결한 기술력이 응축된 것처럼 가치를 드높인다.


'우리는 네 번 압축해도 가격은 0원입니다'


노가다 공사판에서 하루 온종일 몸을 갈아내야 안경 하나 맞출까 말까하고

외국에 살다 온 사람들은 한국 들어올 때마다 안경 몇개씩은 꼭 맞춰가는데


역시 K-안경은 제품 등급에 관계없이 

공짜로 막 퍼줘버리니 이런 천사들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사람들은 또 그러겠지.

'안경테에 이윤을 많이 붙여 먹겠지?

안경이 원래 많이 남으니 저렇게 팔아도 남겠지? 

그동안 동네에서 맞췄던 안경은 다 사기였나 봐.

다초점안경도 홈쇼핑에서 피자보다 싸게 파네.

대체 그동안 얼마를 남겨먹었던 거야.

역시 안경은 개미친 으악똥구멍이 최고야이야이야'


갑자기 또 우울이 도진다.

우울은 분노보다 진화한 감정이다.

그래서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젠 화도 나지 않아 더 화가 나야 하는데도

하루하루 개시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노와 우울을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20대 후반의 여성 손님이 들어왔다.

개시 생각에 기쁨이 차올랐다.


하지만 자신감 있게 문을 열지 않은 걸 보니 대충 수리다.

수리든 뭐든 좋다.

무상이든 유상이든 일단 문을 열어 준 것 만으로도 반갑다.


보통 장기간 개시를 못하면 입이 굳어 손님이 낯설어지고

누적된 스트레스로 반가운 마음보다 귀찮은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은 사람이 반가운 걸 보니 시체의 단계까지는 가지 않은 듯함에

나름의 안도를 한다.


"저기요~"


보통 저기라고 부르면 백퍼 수리다.

내 이름이 저기가 아님에도 자기도 아닌 저기라고 부를 때는

그 안에 수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잠깐. 

여기서 저기요를 분해해본다.


'저기요'

여기요나 거기요보다 겸손함이 있고, 아쉬운 속내가 있다.

하지만 돈의 지불의사까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저기요는 불쾌하지는 않지만 반가움이 반감 된다.


"네~뭘 도와드릴까요"


여성은 주머니에서 안경을 쓱 꺼낸다.


"이거 알 빼 줄 수 있어요?"


빠진 알을 넣어달란 손님은 많아도

끼워진 알을 빼달라는 손님은 소수다.

고로 귀한 손님이다.


빠진 알을 넣어달라는 수리 손님은

재방할 확률이 1%라도 있다면

알을 빼달라는 손님은 더 이상 안경이 필요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기에

재방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


이런들 저런들 안경사의 업이 무조건 손님의 재방을 노리고 

속 보이는 서비스를 해주는 것은 아닐테고


또한 렌즈를 끼우는 것보다 빼는 것이 수월한 일이니

이것은 수리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무념무상의 몸짓으로 드라이버를 돌렸다.


누런 때가 낀 분리된 알을 그냥 건네지 않고

잘 닦아 비닐팩에 고이 담아 주었다.

1일 1선행 실천완료.


여성이 되묻는다.

"저기요~저 이거를 처분하고 싶은데요"


깨끗이 닦아서 줬더니 나더러 버리기까지 하라는 건가.

"네. 필요 없으시면 제가 버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성이 다시 묻는다.

"저 이거 안경점에 다시 팔고 싶은데요

얼마 정도 쳐 주실 수 있어요?"


......


.......


"네????"


사람이 모르면 실수할 수 있고,

세상물정 모를 나이가 아니더라도 상식이 없을 수는 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쿨하게 안사요~ 해버릴까

심심한데 그거 얼마짜리에요 라고 물어보고 흥정이라도 해볼까.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아니 네번 압축한 것도 공짜라던데

어디서 공짜로 얻어다가 나한테 덤터기를 씌우는거냐고

멱살을 잡아버릴까 하는 바람직한 생각을 1초간 해버렸다.


해줄 수 있는 것은 똑같이 저기요 밖에 없었다.


"저기요~.

손님이 쓰다 만 안경렌즈는 타인에게 재활용이 불가합니다.

저희는 전부 폐기처분합니다."


라고 겸허히 방어했지만

솔직히 니꺼 쓰레기에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5.

퇴근할 시간이 되어간다.

눈팅은 가끔하고 악플은 몇 번 달았지만

장문의 글은 몇 년만에 남기는 것 같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젊음을 바치고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매장 안에 평생을 갇혀 살지만 

비록 인간적인 삶을 살진 못하더라도  최소 쓰레기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갈 수록 사람들이 싫어진다


싫어짐은 실망이고 실망은 곧 기대의 결과다.

이 또한 기대를 한 나의 잘못이다.


심각한 불황이라 그런건지

그냥 내 나이가 그런건지

매장 밖에 등대처럼 서 있는 쓰레기더미가 

우울한 하루를 낚는다.





끝.

?
  • ㅇㅇ 2023.12.13 19:33 (*.38.36.155)
    이분은 90년대학번같다ㆍ글솜씨가 좋네
    번지수 잘못찾아 인생망쳤다고 생각할것같다
  • . 2023.12.13 19:46 (*.38.156.115)
    90년대 학번이면 당시 안광과 상위권이라 꿀이라도 빨고 망한거지만 불쌍한 2000년~2020년대 학번이 제일 불쌍함
  • . 2023.12.13 20:36 (*.207.46.58)
    저도 읽으면서 이분은 글을 잘쓰는 분이시구나 생각했어요. 안경원 생활... 안경사생활의 단편을 아주 씁쓸하게 표현하신것 같아요.
  • ㅇㅇ 2023.12.13 20:41 (*.79.30.71)
    와... 필력이 진짜 대단하십니다
  • ㄴㄴ 2023.12.13 21:20 (*.101.70.221)
    가격으로 소비자를 현혹하고 제품으로 기망하는 쓰레기들이 불황을 가속 시켰죠.
    밝은 돼지들보다 우울한 현자의 마음이 풍요로운 법입니다.
    퀄리티 쩌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STICK 2023.12.14 10:23 (*.233.158.247)
    글이 왤케 슬프냐 ㅠㅠ
  • 쵝오 2023.12.14 11:09 (*.85.198.245)
    님 글 잘읽었습니다.
    제 2화도 부탁드립니다. 매주 한페이지씩 ㅎㅎ
    아이옵트 올해 올라온 글중에 최고 입니다. 짝짝짝^^
  • 필력 정말 좋으시네요. 2023.12.14 11:09 (*.213.26.15)
    조목조목 모두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저도 슬프네요;;
  • 시인 2023.12.14 11:49 (*.132.121.110)
    댓글 절대 안 다는 편인데
    필력이 너무 좋으셔서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오늘 날씨는 비 오고 흐려서 그런지 더욱더 와 닿네요
    저도 나홀로 매장이라 요즘들어 더욱 우울함과 공허함이 몰려오네요
    더 나아질거라 다짐하며 힘내요 우리
    종종 글 올려주세요!
  • 필력의신 2023.12.14 12:13 (*.85.198.245)
    형 매주 수욜일에 글올려주샘
    몽말인지알쥬?
  • 1234 2023.12.14 12:40 (*.166.46.184)
    피곤하네
  • 달팽이 2023.12.15 13:45 (*.210.189.110)
    와 안경사 작가님이시네요. 우울한 일상을 슬프지만 담담하게 표현하신글을 공감하며 잘 봤습니다. 왠지 또 다음이 기다려지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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